2009년 11월 16일
서울구경








# by | 2009/11/16 23:15 | 트랙백 | 덧글(0)
이 책의 저자 제임스 도드슨은 미국의 저명한 골프칼럼리스트라고 합니다. 한 때 정치와 범죄를 전문적으로 다루던 잘 나가던 기자였던 저자는 <워싱턴 포스트> 정치부 기자 자리를 제의받고 오히려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고 결국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골프 기자가 되었다는 특이한 사람입니다. 제임스 도드슨은 열세 살에 아버지로부터 골프를 배워 30년 가까이 아버지와 골프를 치며 부자지간의 정을 뛰어넘어 골프친구로서의 우정(?)을 키워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저자에게 골프를 가르쳐주고 인생의 지침이 되어 주시던 아버지 “수수께끼 낙천가 옵티”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습니다. 제임스 도드슨은 더 늦기 전에 바쁘다고 미루기만 하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골프의 성지이자 젊은 시절 아버지의 추억이 어린 영국으로 날아갑니다. 이 골프여행은 결국 저자가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라운드’가 됩니다.
저자는 아버지와 자신의 인생을 골프와 엮어 담담하게 풀어냅니다. 책에는 거의 모든 골프의 역사가 나오고 골퍼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나옵니다. 그 사이사이 아버지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이 스치듯 묘사되고 아버지와 나누는 따뜻한 교감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게 때론 유머러스하며 때론 시니컬하게 얘기를 끌고 가는 저자의 필력이 대단합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라운드’를 기록하지만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아들의 깊은 슬픔이 느껴집니다.
저자의 아버지 “수수께끼 낙천가 옵티”는 정말 멋진 분입니다. 제가 가장 본받고 싶은 아버지상입니다. 아들을 친구처럼 대하면서도 아들의 존경을 받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저도 늘 친구 같은 아버지를 꿈꾸지만 현실은 쉽지 않습니다.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제 자신을 평가하자면 전 도저히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제 의사를 강요하고 권위로 누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이들을 제 소유물처럼 느끼고 애들의 삶에 간섭하고 싶어 안달했습니다. 저자의 아버지처럼 인생의 고비마다 아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며 현명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며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격려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아, 물론 저자처럼 좋은 아들도 되고 싶습니다. 전 그 동안 부모님께 믿음직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우리 아버지야말로 저자의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 제가 어떤 결정을 하든 절 존중해 주십니다. 그런데 전 아버지께 기대기만 하고 아버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헤아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친구 같은 부모보다 친구 같은 자식 되기가 더 어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맬 때마다 꺼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전 골프를 쳐본 적 없습니다. 골프장 근처에도 못 가봤죠. 그렇지만 뭐 골프에 대한 편견은 없습니다. 주변에 골프 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주워들어 친숙합니다. 스포츠 중계방송을 통해 골프룰을 웬만큼 숙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한테 골프는 그저 골프일 뿐이었습니다. 골프 칠 형편이 안 되기도 하지만 형편이 된다고 해도 별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못해봤습니다. 나와는 관계없는 먼 세상의 일이라고 생각했었죠. 한데 이 책을 읽으며 골프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적으로 저자의 필력 덕분입니다. 골프에 대한 온갖 얘기를 하면서도 골프를 좋아하든 안 하든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쓴 저자의 내공이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좋은 부모, 좋은 자식을 꿈꾸는 모든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골프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 by | 2009/11/04 12:46 | 남 다르게 읽는 책 | 트랙백 | 덧글(0)
나는 회의론자다. 아무리 신비하고 그럴 듯해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은 믿지 않는 사람이다. 숙명이니 운명 따윈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내가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예컨대 책이나 영화 제목만 보고 미래 언젠가는 내가 읽고 보게 될 것을 예감하는 경우다. 그런 경우 아직까지 내 예감이 틀린 적은 없다.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결국 그 책이나 영화를 보게 된다. 하긴 이것도 잘 생각해보면 신기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이미 내 마음에 그 책이나 영화를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으니.
각설하고, 나에게 설악산 대청봉은 그런 책이나 영화 같은 존재였다. 유년기에 벌써 언젠간 가볼 거라는 예감을 가졌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언젠간 설악산 대청봉에 오를 것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았다. 군대를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일처럼 나는 당연히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게 될 터였다. 그런데 살면서 내 삶은 설악산과 점점 멀어져만 갔다. 한두 번 찾아 온 기회를 이런저런 핑계로 흘려보내는 사이 어느덧 나이는 들고 체력은 떨어졌다. 기회는 차츰 줄어들었고 자신감은 점점 떨어져갔다. 내 예감이 틀린 걸까? 어쩌면 평생 못 가볼 수도 있겠구나. 설악산을 내 숙명리스트에서 지우려 할 바로 그 즈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0월23일부터 24일까지 대학때 동아리 선후배들 모임인 산우회의 무박이일 대청봉산행이 잡힌 것.
한 달 전 처음 이 계획을 들었을 땐 가벼운 전율이 일었다. 아내에게 프러포즈하기 전 느꼈던 바로 그 떨림. 이 여자다! 놓치면 안 된다! 대청봉아, 이제야 우리의 인연이 맺어지는구나! 한데 문제가 생겼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리는 거다. 과연 현재 몸 상태로 갈 수 있겠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제기였다. 몇 달 전 ‘궤양성대장염’이라는, 꽤나 중병에 걸려 입원을 했었고 현재도 치료중인 상태에서 설악산 무박이일 산행은 무리라는 게 주변의 평가였다. 의사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와 친구까지 나서서 말렸다. 특히 내 몸 상태를 가장 잘 알고 대청봉을 올라 본 경험도 있는 아내는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이제 겨우 체력을 끌어올리는 중인데 무리한 산행으로 자칫 큰 후유증이라도 생긴다면 지금까지의 치료가 물거품이 된다는 것. 더구나 대청봉은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발병 후 가장 마음고생이 심했을 아내의 말이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은 뜻밖의 곳에서 풀렸다. 한가위를 맞아 울산에 내려갔다 어른들께 의견을 물었더니 뜻밖에도 어머니가 적극 산행을 권유하셨다. 환갑 진갑 다 지난 당신께서도 불과 몇 년 전 다녀왔는데 아무리 아팠다고는 하지만 젊은 아들이 못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무조건 가라고 하시는 거다.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그만한 보람이 있으니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꼭 가보라며 등 떠밀어 주시니 없던 용기가 팍 솟았다. 본시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 데는 여러 사람의 지지는 필요 없는 법. 그녀는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다. 간다. 기다려라, 대청봉!
산행 전날부터 가벼운 흥분이 이어졌다.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좀 자 두어야 했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밤을 새워 오르려면 버스 안에서라도 잠깐 눈을 붙여야 하는데 그마저도 잘 안 됐다. 23일 밤 9시 정각에 사당을 출발한 25인승 미니버스는 승차감이 좋지 않았다. 2차집결지인 도농으로 가는 동안에 벌써 심하게 덜컹거린다. 거기에 더해 통로 좌석은 아예 목을 기댈 수도 없는 접이식의자. 도농에 도착하여 사람들을 태우니 딱 16명. 배낭을 통로에 놓고 앉으니 빈틈이 없다. 다행히 목을 가누지 못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리조차 마음껏 뻗을 수 없는 형편이다. 아무튼 버스는 예정시간인 10시 정각에 도농을 출발 오색으로 향했다. 평탄한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는데 왜 그리 덜컹거리는지! 겨우 잠들만 하면 버스가 카우보이를 떨어뜨리려는 로데오 황소처럼 엉덩이를 뒤채는 바람에 도무지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느긋하게 오뎅 하나씩 먹고 늑장을 부리며 갔는데도 오색에 도착하니 새벽1시20분, 등산로 개방시간인 2시까지는 여유가 있다. 원래 공식적으론 야간산행은 금지고 새벽산행도 3시부터 허용되는데 통상 일출시간에 맞추기 위해 2시에 문을 연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이런 비현실적인 법이나 규정이 많다.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원칙을 고수하든가 아니면 법이나 규정을 현실화하는 게 좋지 않을까? 분명 있는데 없다고 말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눈 가리고 아웅 식 행태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처음 도착할 땐 우리가 일찍 와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새벽2시가 가까워오자 관광버스가 여러 대 도착하더니 삽시간에 등산로 입구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장비를 점검하노라니 정확히 2시 정각에 입구가 열렸다. 우리도 서둘러 설악산 국립공원으로 들어갔다. 저마다 헤드랜턴을 낀 등산객들이 빠르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가 좁아 두 명이 나란히 오르기가 힘들 정도다. 당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가 일어난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이건 숫제 줄서서 밀고 올라가는 형국이다. 덕분에 매우 가파른 길임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가쁠 일은 별로 없다. 대신 쉬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올라야 한다. 멈추면 뒷사람에게 방해가 된다. 어둠 속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오르는 야간산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계단이 계단이...하늘에 걸쳐 놓은 사다리 마냥 끝도 없이 위로만 위로만 이어진다. 낮이었으면 분명 질려 포기하고 말았으리라! 인간의 의지는 감각에 쉬 휘둘린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는다. 보이지 않으니 두려움도 없다. 한 발 한 발 앞사람의 발 디딘 자리만 보고 오르고 또 오른다. 아! 이것이 무아의 경지인가! 야간산행은 우리네 인생을 닮았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네 인생이야말로 바로 야간산행이 아닌가! 바로 앞은 모르지만 종착지는 알고 있다. 누구나 도달하는 그곳. 그곳에 도달했을 때 나는 과연 웃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바로 한 치 앞 내 발 디딜 곳을 잘 살피고 뚜벅뚜벅 오르는 게 최선이다. 미래를 모른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축복인가!
무아지경 속에 오르다보니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50분 오르고 10분 쉬는 식으로 올랐는데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등줄기에 한 바탕 땀이 흐르고 나니 발걸음이 훨씬 부드럽다. 날씨가 예상보다 따뜻해 땀이 많이 난다. 겉옷을 벗고 올랐다. 두 번 정도 쉰 다음부터 쉬는 사이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입김이 하얗게 나온다. 쉴 때마다 기온이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오를수록 안개가 짙어지더니 는개비가 되어 흩뿌린다. 헤드랜턴 불빛에 비친 소나무마다 하얀 서리꽃이 피었다. 녹색 솔잎 위 하얀 장식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예쁘다.
오색에서 대청봉까지가 5km. 정확하게 4시간 만에 마침내 대청봉에 올랐다. 가릴 곳 없이 드러난 대청봉은 몹시 추웠다. 더구나 짙은 안개에 바람까지 거세 체감온도는 영하15도! 몸이 덜덜 떨려온다. 땀에 젖은 옷과 양말을 벗고 챙겨온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귀찮다고 안 가져가겠다는 걸 마누라가 억지로 접어 배낭에 넣어줬는데 안 가져왔으면 얼어 죽을 뻔 했다. 아내 말 들어 손해될 것 없다! 예쁘고 현명한 마누라, 내려가면 찐한 뽀뽀 한 방 날려 주리라.

일기예보에 따르면 일출시간은 6시43분경이라는데 사방이 운무에 둘러싸여 천지간을 구분할 수 없다. 사진을 찍으니 플래시 불빛이 안개입자에 반사돼 식별이 어려울 정도다. 날은 서서히 밝아 오는데 빛줄기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미련에 간식을 먹으며 기다려보지만 일출을 보기는 영 글렀다. 아쉽지만 얼어 죽기 전에 하산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세상 일이 언제 우리 뜻대로만 된 적 있던가! 대청봉만 오르면 당연히 일출을 볼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게 얼마나 순진하고 교만한 생각이었던가! 대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겸손을 일깨운다. 하산을 서둘렀다.

대청봉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온통 안개천지다. 언뜻언뜻 기암괴석이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었지만 설악산의 전모는 확인할 수 없었다. 보이는 건 무겁게 흘러가는 운해. 우리가 내려갈 코스는 희운각을 경유해 천불동 비선대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쪽도 매우 가파른 암벽이 이어지는데 힘든 코스마다 철제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등산객의 편리를 도모한 배려겠지만 재미가 덜하다. 요즘은 산마다 이렇게 인공계단이 많은데 설악산은 그 중에서도 많은 편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니 자연훼손을 막는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나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자연을 만끽하고파 찾아 온 곳에서 만나는 인공시설에 발걸음이 버성긴다.

원래 계획은 희운각까지 내려가서 아침을 먹을 생각이었으나 도저히 중청대피소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추위와 배고픔이 심해서 그냥 자리를 펴고 주저앉았다. 라면을 끓이고 소주잔을 돌렸다. 휘몰아치는 차가운 안개바람 속에 마시는 따끈한 라면 국물 맛은 어떤 일류요리보다 맛있다. 김치를 충분히 싸 와서 더욱 좋다. 뿌듯하고 행복하다. 행복의 조건이란 이렇듯 사소하고 소박한 것을. 욕망의 크기가 자신의 크기를 능가하는 한 지상 위에 행복은 없다.
날씨가 추워 중청대피소로 사람들이 몰렸다. 마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없다. 자리를 정리하고 희운각으로 향했다. 소청봉을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해지면서 안개도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등산로 좌우로 드러나는 나무와 바위들이 기기묘묘하다.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내려오다 우뚝 솟은 멋있는 바위가 있어 올라섰다. 일순 안개가 살짝 걷히면서 바위 넘어 천불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을 뚫고 일천 불상이 우루루 일어선다. 아! 이 무슨 조화인가! 멋진 산수화 한 폭이 펼쳐진다. 아니, 어찌 한갓 산수화를 이 대자연에 비기랴! 수수만년 대자연이 만들어 낸 예술작품에 입이 절로 벌여지고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희운각에서 다시 라면을 끓여 먹고 남은 간식을 나눠 먹고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했다. 이 정도면 힘든 코스는 없으리라 여겼는데 그건 나만의 오산이었다. 끝도 없는 계곡이 이어진다. 좌우로 보이는 절경에 감탄하며 무릎을 관통하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걷고 또 걸었다. 이제일까 저제일까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무릎의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절경을 여유 있게 즐기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젊음이 영원할 줄 알고 몸을 관리하지 않았던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계곡으로 내려가 말 그대로 명경지수에 발을 담그니 순식간에 모든 피로와 고통이 사라진다. 비로소 경치를 즐길 여유가 생긴다. 단풍은 거의 졌지만 참으로 아름답다. 어머니가 꼭 가보라고 하신 이유가 이거였구나! 무릎이 끊어져도 원망스럽지 않을 절경이다.



비선대를 거쳐 설악동까지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무릎이 아프더니 나중엔 종아리까지 경련을 일으켰다. 계단 하나를 내려갈 때마다 천근의 무게가 다리를 누르는 것 같다. 나중엔 평지에서도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설악동에 도착한 후 다시 그런 길을 2.5km나 더 걸을 땐 정말이지 주저앉을 뻔 했다. 다 왔다고 여겼는데 설악동엔 버스가 올라올 수 없어서 바깥 주차장에 있으니 걸어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 거리가 무려 2.5km였다.

집에 바로 갈 것이냐 원래 계획대로 동해안으로 가서 회를 먹을 것이냐 논란이 있었지만 이런 기회가 자주 있을 것 같지 않았기에 힘들더라도 회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약 20분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봉포항이라는 작은 항구. 고깃배가 정박해 있는 바닷가에 깔끔한 회센터가 서 있다. 일층에서 고기를 직접 골라 위로 올라가면 바로 회를 떠 주는 곳이다. 대개 이런 곳은 별로 깔끔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회도 신선하고 반찬도 깔끔하다. 회가 양이 많아 다 먹지 못할 정도였고 매운탕도 시원했다. 졸음만 아니었다면 푸근히 즐기면서 먹을 수 있었을 테데 그럴 수 없어 아쉬웠다.

그렇게 길고 긴 산행과 뒤풀이가 마침내 끝났다. 밤을 새우고 15시간 동안 걸었던 거리는 총 20km. 원래 계획보다 무려 4시간 이상 늦어진 산행이었고 중간에 힘든 고비도 있었지만 아무튼 모두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 초등학생까지 낀 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일행들로선 최선의 산행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다. 2009년은 개인적으로 많이 힘든 한 해였는데 10월이 가기 전에 좋은 선물을 받은 셈이다. 애태우며 멀어져만 같던 설악산은 이런 극적인 인연을 준비하고 있었던가 보다. 아직도 종아리에 뻐근함이 남아 있지만 가슴은 뿌듯한 자부심으로 충만하다. 이 경험은 남은 내 삶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리라.
# by | 2009/10/29 22:36 | 누구나 남 다른 인생 | 트랙백 | 덧글(0)
나이 마흔을 넘기고 문득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니 참 후회스러운 순간들이 많습니다. 그 중엔 그냥 후회로 그칠 일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질 만큼 부끄러운 일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후회스럽고 부끄러웠던 순간을 고백해볼까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대학입시생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이 있죠. 예, 바로 체력장 말입니다. 때는 고3 가을, 바야흐로 체력장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학교에선 단체로 체력장 대비 연습을 시켰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제가 전교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저질체력의 소유자였거든요.
지금은 각종 스포츠를 즐기고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게 되었지만 그때는 운동을 몹시 싫어하는 아이였습니다. 원체 운동신경이 없어 어릴 때부터 운동경기에 잘 끼지 못했던 게 운동과 멀어진 원인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후엔 공부한다는 핑계로 더 운동을 멀리했었지요.
안 그래도 체력이 약한데다 평소 운동조차 멀리했으니 당시의 제 몸 상태가 어땠는지는 상상이 가실 겁니다. 백 미터 달리기야 초등학교 때부터 쭉 꼴등을 도맡아 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턱걸이는 매달리는 즉시 떨어지는 수준에, 멀리뛰기는 마치 쇳덩이를 다리에 매달기라도 한 듯, 온갖 용을 써서 뛰어봤자 땅이 자석이라도 되는 양, 지면에 철커덕 붙어버리는 형편이었습니다. 도약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였지요. 다른 종목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문제는 오래달리기였습니다. 말 그대로 “오~~래달리기”였다면 제가 일등이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오래달리면 안 되는 종목이 오래달리기 아니겠습니까! 보통 연습 때면 남들보다 한 바퀴 이상 뒤쳐져 오~래오~래 달리곤 했지요. 사실 그 당시엔 그나마 완주라도 하면 다행일 정도였습니다.
평소 운동이라곤 안 하다가 체력장 시험이 코앞에 닥쳐서야 운동을 시작했으니 성과가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처음 백 미터 달리기 기록을 재던 날, 체육선생님이 저의 달리는 자세와 기록을 보고 막 화를 내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야, 이노무 짜슥아! 이기 지금 장난이가? 어잉! 어데 무성의하게시리...”
이건 뭐, 마이클 잭슨도 아닌 놈이 백 미터를 흐느적대며 “문워크” 하듯 달렸으니 당연하지요. 저는 억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죽기 살기로 뛰었거든요. 그렇게 열심히 뛰었건만 발이 공중에서 우아하게(?) 헛발질을 한 게 제 잘못이란 말인가요? 처음으로 부모님을 원망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언젠가 운동회 날, 그날도 여지없이 꼴찌를 하고 부모님께 따지듯 물어 본 적이 있었거든요.
“엄마, 도대체 나는 누굴 닮아서 이래 느리노?”
당시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셨던 어머니께 강력한 혐의를 둔 질문이었습니다만 답변은 예상 외였습니다.
“너그 아부지 닮았제. 내는 핵교 댕길 때 뜄다카모 일등이었다. 운동회만 하모 상으로 받은 공책이 한보따리였데이. 오죽하모 내가 공책 한 권 안 사고 핵교 댕깄겠나!”
어머니 그 말에 옆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쑥스럽게 웃으시며 털어 놓으시는 겁니다.
“사실은.... 내가 어릴 때 달리기는 쭉 꼴등이었제. 우리 집 사람들은 다 발목이 굵어서 달리기가 안 돼. 니도 내 닮아 발목이 굵어서 그런갑다.”
뜻밖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늘씬한 몸매에 만능스포츠맨이셨거든요. 성인이 된 후 열심히 운동을 해서 그렇게 되셨다는 겁니다. 그러곤 “노력하면 니도 할 수 있다”고 덧붙이셨는데 정작 저는 노력할 생각은 안 하고 그날 이후 아버지만 원망했던 거지요.
그러나 저러나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마침내 운명의 체력장 시험일을 맞았습니다. 그 때 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체력장은 응시만 해도 20점 만점에 기본 16점은 주잖아요. 잘 하면 18점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까짓거 손해 본 점수는 공부해서 메우면 되지’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말이 쉽지 학력고사 점수 2점 올리기가 그렇게 쉽습니까! 그럴 줄 알았으면 괜히 공부할 시간 빼서 체력장 연습했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온 세상이 다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체력장 시험은 다른 학교 운동장에서 있었습니다. 운동장은 수험표를 단 여러 학교 학생들로 북새통처럼 복잡했습니다. 우리 반도 응시 번호대로 대열을 지어 종목을 나누어 기록을 재기 시작했습니다. 첫종목은 멀리뛰기였습니다. 앞 친구들 하는 걸 보니 발판의 파울선을 슬쩍 밟아도 판정선생님이 지적을 하지 않으시더군요. 옳다구나 싶었죠. 제 차례가 왔을 때 발을 슬쩍 구르는 척 하며 발판 끝을 발바닥 중간으로 질끈 밟고 냅다 뛰었습니다. 그런 저를 판정선생님이 째려보시더군요. 아차, 너무 심했나 싶었는데 제 기록을 보신 선생님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시며 그냥 넘어가시더군요. 그래봐야 남들보다 형편없는 기록이었으니 어이가 없으셨던 듯합니다. 어쨌든 저는 평소에 비해 점수를 좀 벌었습니다.
다음은 백미터 달리기. 두 명이 짝이 되어 달리는 방식이었는데 응시생이 많아 한조가 출발하고 30미터 쯤 달릴 때 다음 조가 연이어 출발하는 식으로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번엔 우리 반 한 친구의 기지가 저를 살렸습니다. 제가 우리 반 꼴찌라면 꼴찌에서 2등인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원래 제 파트너가 아니었죠. 그런데 이 친구가 순서를 바꿔 제 옆으로 온 겁니다. 저는 그 때까지도 이 친구의 의도를 몰랐습니다. 결승점에 다라를 즈음에야 친구의 의도를 알겠더군요. 둘 중 하나가 잘 달린다면 차이가 많이 벌어질 텐데 우리 둘은 그야말로 막하막하(?), 굼벵이와 달팽이 수준이었으니 어쨌든 비슷하게 결승선에 들어왔습니다. 마침 우리 뒤에 출발한 두 명은 엄청 빠른 친구들이었습니다. 30미터나 앞서 달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친구들이 우리와 거의 동시에 결승선에 들어오며 우리와 뒤엉키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행운이 일어났습니다. 하도 빨리 진행되다보니 선생님들이 정신이 없었던 거겠죠. 나중에 기록표를 보니 우리 둘은 13초대 기록이 적히고 뒷조의 친구들은 16초대 기록이 적힌 겁니다. 뒷조 친구들은 몹시 억울해 했지만 둘 다 한 종목 쯤 망쳐도 총점 만점 받는데 전혀 문제가 없던 녀석들이라 그냥 툴툴대며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또 큰 점수를 벌게 되었죠.
그 뒤 이어진 윗몸일으키기와 멀리던지기는 그럭저럭 평균 수준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종목인 턱걸이가 문제였습니다. 턱걸이는 정말 대책이 없었습니다. 펄쩍 뛰어 오르며 한 개는 겨우 했지만 그 다음은 안타깝게 몇 초 매달려 있다 그냥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생각지 못했던 행운이 따랐습니다. 판정선생님이 그런 저를 보시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물으셨습니다.
“아이구, 짜슥아! 니는 공부도 몬 하제?”
저는 부끄럽고 억울해서 얼굴을 붉히며 대답도 못하고 섰는데 친한 친구 현준이가 대신 변명을 해 주었습니다.
“아입니더. 이누마 공부 잘 합니더. 고3 되더마 공부하느라고 몸이 좀 안 좋아져서 그렇지, 공부는 잘 합니더.”
“그래?”
판정선생님은 다시 한 번 붉어진 제 얼굴을 흘깃 보시더니 제 팔뚝에 매직으로 턱걸이 개수를 적어주시는 겁니다. 그 때 저는 그 판정선생님과 친구를 원망하느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습니다.
‘남이야 공부를 잘하든지 못하든지 ....와 간섭이고? 그라고 현준이 이 자슥은 지가 뭔데 남 일에 끼어드노. 내가 언제 변명해 달라켔나. 에이 쪽팔리 죽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록관에게 팔뚝을 내밀던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판정선생님이 1이 아닌 11을 적어주셨던 겁니다. 제 옆으로 다가 온 현준이가 제 팔뚝을 보더니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데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과 친구가 고맙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두 사람을 원망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해서 차마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그렇게 울상이 되어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아무튼 연속된 행운으로 점수를 번 덕분에 저는 이제 총점 18점을 확보한 상태에서 오래달리기만 만점 받으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20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오래달리기는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에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운동장으로 흩어져 점심 도시락을 먹는데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반 애들 기록을 일일이 점검하셨습니다. 반 친구들 거의가 이미 만점이 무난한 상태였고 저를 포함한 네댓 명 정도가 오래달리기 기록에 따라 만점 여부가 달라지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네댓 명은 당연히 자기기록으론 만점이 불가능한 애들이었죠.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미 만점을 확보한 친구들에게 수험표를 바꿔 달고 대신 뛰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명백한 부정이고 잘못된 일이지만 당시엔 어느 정도 관행이었습니다. 친구들도 별 거부감 없이 선생님 부탁에 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다른 친구한테 부탁하기가 싫어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이번엔 병국이란 친구가 수험표를 바꿔달자고 왔습니다. 그 때도 저는 얼굴만 벌게져 친구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있었죠. 누가 보면 마치 병국이가 저한테 부탁하는 모양새였습니다. 이래저래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아무튼 저도 수험표를 바꿔 달게 되었습니다. 수험표를 바꿔 달 때 병국이가 한 가지 부탁을 하더군요.
“내가 지금 총점에 딱 1점이 부족하거든. 4분50초 안에만 들어오면 되니까 그거는 되겠제?”
그 정도는 무난할 것 같았습니다. 연습 때 4분30초 정도에 뛴 적이 있었거든요. 지금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만점은 3분50초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1분이나 더 여유가 있다면 저도 충분하리라 믿었죠. 그런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이들이 우루루 달려 나가는 걸 저도 모르게 따라 뛰었더니 초반에 그만 오버페이스했나 봅니다. 예상대로 다른 애들보다 한 바퀴 정도 처진 것은 좋았는데 가슴이 터질 듯 뛰고 다리는 천근만근, 도저히 더 이상 뛸 수 없는 몸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200미터 트랙을 다섯 바퀴 돌아야 되는데 저는 네 바퀴를 도는 시점에서 이미 빈사상태였습니다. 그 때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었죠. 그 와중에도 전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아직 한 바퀴가 남았지만 다른 애들에 슬쩍 끼어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판정관 중 예리한 눈매의 한 선생님이 저를 콕 찍어 “야, 너 한 바퀴 덜 뛰었잖아!”라고 지적하시질 않겠습니까! 어찌나 원망스럽던지요! 하긴 워낙 느려서 눈에 띌 만도 했죠. 아무튼 그 바람에 약 1분이 남은 상황에서 저는 혼자 한 바퀴를 더 돌게 되었습니다만 이젠 정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터덜터덜 걷는데 이미 다섯 바퀴를 다 돈 병국이는 그런 저를 보고 정신이 나갔겠죠. 친구 도와주려다가 정작 자기가 피 같은 학력고사 점수 1점을 날리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병국이가 제 몸을 부축하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술보야, 안 된다. 짜슥아! 내 1점! 내 1점!”
저는 다리를 절뚝절뚝 절다시피 다시 뛰기 시작했고 그런 저를 병국이가 곁에서 껴안다시피 하고 뛰었습니다. 제가 지쳐 주저앉으려 할 때마다 병국이가 고함을 치며 다그치고 격려하며 길고도 긴 트랙을 둘이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운동장의 온 수험생과 판정선생님들은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감동에 젖어들었습니다. 운동장의 온 사람들이 우리를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매 순간이 슬로우비디오로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결승선에 들어왔을 때 온 운동장엔 환호와 박수가 터졌습니다. 기록은 4분48초!
기록을 확인한 병국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저를 던져버리고 가버렸습니다. 저는 그렇게 운동장에 쓰러진 채로 한 시간 이상을 누워 있었습니다. 정말 죽을 것처럼 가슴이 뛰고 힘들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사실은 너무 부끄러워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운동장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부끄러운 순간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고 당시의 관행이었다 해도 부정을 저지른 것이 일단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노력하지도 않은 주제에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기만 하고 도움에 고마워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 뒤로도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못했습니다. 그 뒤 우리는 졸업을 하고 서로 다른 지방의 대학을 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순수한 우정으로 조건 없는 도움을 줬던 친구들에게 지금이라도 그 때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친구들아, 그 때 참 고마웠다. 보고 싶다.”
제 인생에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 이상하게 그 시절이 그립네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by | 2009/10/12 12:20 | 누구나 남 다른 인생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