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발에 쥐 잡다 누구나 남 다른 인생


별일 없으면 대개 평일 오후 4시부터 6시 사이는 탁구장에서 지낸다. 탁구는 지금 내 상황에 딱 알맞은 운동이다. 온몸을 쓰는 유산소운동으로 운동량이 상당하다. 한편, 운동은 해야 하지만 자칫 무리하면 안 되는 난감한 입장이라 운동량이 너무 많아도 문젠데 탁구는 알아서 조절하기 쉽다. 힘들면 언제든 중단할 수 있어 좋다. 실내스포츠라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좋다. 가까워서 접근이 용이하고 비교적 저렴한 점도 장점이다.

시간대가 그래선지 그 시간엔 대부분 어르신들이다. 남자 고수는 거의 보기 어렵고 여자 고수도 드물다. 내가 가장 젊고 잘 치는 축에 든다. 어르신들은 내가 가면 좋아하신다. 아무리 초보라도 가능하면 상대해주기 때문이다. 춤 배울 땐 손 잡아주는 사람이, 탁구 배울 땐 공 받아주는 사람이 하느님이다! ^^

대개 한 분에 15분 정도씩 돌아가며 상대해 드린다. 어르신들이 알아서들 순서나 시간을 조절하기 때문에 곤란한 상황은 없다. 내가 간이식 수술 받은 걸 다들 아시기 때문에 힘들다 싶으면 언제든 중단하고 쉴 수 있다.

어르신들은 나한테 고마워하시지만 사실 나도 많은 도움이 된다. 초보나 하수의 공은 일정하지 않다. 코스나 구질이 들쭉날쭉 예측불허다. 어르신들은 잘못 쳤다고 미안해하시고 그런 공도 잘 받아 보내준다고 고마워하시지만 오히려 나는 그런 상황을 즐긴다. 불규칙한 공을 가능한 정확한 자세로 받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오히려 내가 땀으로 흠뻑 젖는다. 나는 공짜로 레슨 받는다고 생각하고 스텝훈련, 자세전환훈련의 기회로 삼는다.

게임은 가능한 피한다. 폼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게임 위주로 치다 보면 이기기 위한 요령만 늘어 자세가 엉망이 되기 쉽다. 비슷한 사람들과 게임하는 재미에 빠져 지내면 실력은 제자리걸음이다. 아니 오히려 줄어드는 경우가 더 많다. 시간 나면 나는 혼자 볼박스로 서브 연습을 하거나 거울을 보고 자세교정을 주로 한다. 진짜 센 공을 받아보고 싶거나 드라이브 같은 걸 연습하고 싶을 땐 머신을 이용하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른 게임을 하고 싶어 한다. 겨우 공을 좀 넘기게 되면 바로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주로 복식을 먼저 하는데 이건 초보라도 편을 잘 먹으면 그럭저럭 재미있게 칠 수 있다. 그렇게 게임을 계속 하다 보면 서서히 우열이 갈린다. 자기만 실력이 안 늘고 자꾸 지면 짜증이 난다. 그럴 때 공부를 좀 하고 레슨도 받고 해야 느는데 대부분 그렇게 안 한다. 대개 그 고비를 못 넘기고 그만두거나 다른 탁구장으로 옮긴다. 그래봐야 똑같은 반복인데……. 이긴다고 좋아할 것도 아니다. 그 사이 폼은 무너지고 안 좋은 습관이 고착돼 실력이 안 는다.

분기에 한 번씩 탁구장내 시합이 열린다. 이때는 각 시간대별로 흩어져 치던 탁구클럽멤버들이 대부분 참가해 조를 짜고 토너먼트를 벌인다. 대개 상, 중, 하로 별도의 조를 만들어 비슷한 실력들끼리 시합하게 안배한다. 며칠 전 그 시합이 열렸다. 나는 참가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침 우리 시간대에 50대 후반의 남자분이 복식을 나가고 싶은데 적당한 짝이 없다며 같이 나가달라고 요청해 할 수 없이 참가하게 되었다.

그 분은 주로 게임을 많이 해 요령은 있는 편이지만 겨우 하급조를 면한 정도의 실력인데 중급조에서 한번 뛰어보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내 몸 상태가 시합은 조금 무리다 싶었지만 그 분의 간곡한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참가신청을 하니 내가 오래 운동을 쉬기도 했고 가장 하수들이 많은 시간대에서 놀다보니 인지도가 낮아 기껏해야 중급조에서도 겨우 말석에 끼워준다. 그나마 남자고 젊은 편이라 봐준 셈이다. 우리 시간대의 어르신들도 내가 게임하는 걸 별로 본 적 없고 간혹 보더라도 그저 무난하게 넘겨주는 정도라 큰 기대들을 안 하시고 우리가 중급조에 참가하게 된 것만도 부러워하셨다.

시합 당일, 추첨을 하니 운 좋게 첫 판이 부전승이다. 속으로 체력이 달리는데 참 다행이다 싶었다. 부전승 덕분에 두 번째 판이 바로 준결승이다. 결과는 풀세트 접전 끝에 겨우 이겼다. 게임 감각이 떨어져 초반에 미스를 좀 했다. 다행히 후반부로 갈수록 몸이 풀리면서 감각이 살아났다. 마침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팀에서 실수가 나와 이길 수 있었다. 이때만 해도 운이 좋았다고 다들 생각했다. 우리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다. 내 파트너분은 한 게임 이긴 것만도 좋아서 상기된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결승에서 상대할 팀은 평소 우리가 우러러보는 고수들이었다. 아주 가끔 우리 시간대에 와서 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중급조라니 약간 사기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것도 한 명만 잘 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거의 엇비슷한 실력이라 가히 필승조였다. 초반 게임은 예상대로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아무래도 게임요령과 팀웍이 부족한 우리팀인지라 실수가 많았다. 특히 상대의 서브에 익숙하지 않아 쉽게 두 세트를 주고 말았다.

우리 둘은 어차피 질 거라면 원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해보자고 파이팅을 외쳤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3세트 들어가자마자 내가 그동안 아껴두었던 비장의 서브를 넣었다. 동영상을 보며 혼자 열심히 연습했지만 실전에서 쓸 만큼 숙달된 서브는 아니었다. 다행히 두 번의 서브가 다 제대로 들어갔다. 상대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래선지 쉬운 공에도 어이없는 미스가 이어지더니 우리에겐 행운도 따랐다. 네트 맞고 넘어가거나 엣지가 나면서 3세트는 우리가 이겼다. 기세라는 게 있는지 접전 끝에 4세트도 이겼다.

그런데 4세트 후반쯤엔 상대팀이 내 비장의 서브에 대한 해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세트에 들어가니 리시브가 제대로 들어왔다. 점점 랠리가 길어지면서 우리의 열세가 짙어졌다. 역시 여기까지인가 싶을 때 마침 서브교체 타이밍이 되었다. 마지막 세트는 한쪽이 5점을 따면 다시 진영과 서브 순서를 바꾼다. 이게 행운을 불러왔다. 상대의 어이없는 실수와 우리의 엣지볼이 겹치면서 순식간에 듀스가 되었다.

고수들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긴장이 되는지 가장 안전한 작전으로 나왔다. 강한 커트 랠리! 아무래도 기량이 딸리는 쪽이 랠리가 길어지면 불리하다.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과감하게 드라이브를 걸기엔 떨리는 상황이다. 상대는 우리가 드라이브를 걸 실력이 안 된다고 보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아예 우리 빽쪽으로 집요하게 강한 커트를 걸어왔다. 우리도 겨우 커트로 받아넘기기에 급급했다. 랠리가 이어질수록 초조해지는데 순간 내가 동영상을 보고 혼자 머릿속으로만 연습해보던 일명 '치키타'란 기술이 생각났다.

탁구대에 붙은 채로 빽쇼트 자세에서 라켓을 탁구대 밑으로 떨어뜨렸다가 손목만 잽싸게 돌려 라켓을 수직으로 부채처럼 회전시키는 기술이다. 그러면 강한 횡회전으로 커트볼의 역회전을 이겨 상대 코트에 낮고 빠르게 꽂히게 된다. 실전에 써본 적은 없었지만 순간 확신이 들었다. 공을 끝까지 보고 빠르게 돌렸다. 멋지게 작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대는 놀라 헛손질! 듀스 어드벤티지 상황에서 상대의 실수가 나왔다. 당황해서 그랬는지 로빙볼이 올라왔다. 찬스지만 사실 어려운 공이다. 하수들이 가장 치기 어려운 공이기도 하다. 좋다고 달려들다간 헛손질하기 일쑤다.

침착하게 공을 기다렸다. 탁구대에 맞고 높게 튀어오르는 공! 미리 자세를 잡고 오른 다리에 힘을 주고 왼 다리를 살짝 들었다 놓으면서 오른팔을 크게 회전시키다가 상대가 내 어깨 모션을 간파하고 코스를 예측해 잡으러 뒤로 빠지는 걸 슬쩍 보고 약하게 톡 반대쪽으로 넘겼다. 완벽한 속임수!

꼴찌예상팀이 우승후보를 누른 순간이다. 우리 시간대 어르신들은 난리가 났다. 마치 자기가 이긴 것처럼 함께 기뻐해주셨다. 관장님과 고수들의 칭찬도 이어졌다. 이겨서 기분 좋기는 한데 이거 숨겨 둔 실력이 뽀록났다. 그래봐야 3~4부인데..흐흐..다음 주부터 좀 귀찮아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술보 일기)

덧글

  • bullgorm 2017/06/14 17:30 # 답글

    권투에서는 럭키펀치라는 게 없다고 합니다.. 탁구도 아마 그럴 겁니다..
  • 심술보 2017/06/15 14:08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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