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오르면 하수다 누구나 남 다른 인생

탁구장에 60대 후반의 남자분이 계시다. 연세에 비해 젊어 보이고 탁구도 잘 치신다. 이 분이 유난히 승부욕이 강하시다. 지고는 못 산다. 게임 하다 지면, 이길 때까지 해서 기어이 이겨야 끝낼 정도로 근성이 있다. 내기도 좋아하신다. 그래봐야 탁구공 내기 정도지만 승부욕이 강해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내가 오랜 만에 탁구장에 나왔을 때 새로 뵌 분인데 첫날 바로 성격을 파악해 그 동안 계속 피해왔다. 탁구 실력은 나보다 못하지만 요령이 좋고 임기응변이 강해 막상 단판승부로 붙으면 100% 이긴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승부야 져도 그만이고 장기적으로 게임을 하다보면 우열이야 갈리겠지만 승패보다 그 이후가 부담스러워 의도적으로 마주치지 않으려 했었다.

 

며칠 전 그 분과 어쩔 수 없이 함께 게임을 하게 되었다. 복식 멤버가 부족해 뒤로 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분과 같은 편이 되었다. 게임을 시작하고 조금 진행되니 아무래도 다행 쪽은 아닌 것 같았다. 초반에 내가 실수를 좀 했다. 몸이 덜 풀려 미세하게 엇박자가 나고 스윙이 흔들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분이 자꾸 내 시야와 진로를 가린다. 친하지도 않은데 뭐라고 하기 그래서 그냥 넘어간 게 실수였나?

 

내가 실수할 때마다 핀잔의 눈길을 보낸다. 이상하게 말로 핀잔 준 거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마치 자기보다 한참 하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표정인데 이게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긁는다. 당신이 가려서 내가 대처하기 어려웠던 상황이라 억울하기도 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말할 타이밍을 놓쳐 이제와선 별 수 없다. 평소보다 좀 더 집중해 한 구 한 구 최선을 다했다.

 

나는 다행히 몸이 좀 풀리면서 제 실력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양반의 실수가 이어졌다. 그런데 자기가 실수한 건 그냥 웃고 넘어간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인데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나도 가끔 그러니까! 결국 게임은 우리가 졌다. 문제는 게임이 끝나고 나서인데 사람들 앞에서 상대팀 사람들에게 이러는 게 아닌가!

 

한 게임 더 해. 근데 이 친구가 약하니까 우리한테 핸디를 좀 줘.”

 

상대팀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한 명은 나와 동수(同數)고 한 명은 내가 4점 접어주고 치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뭔 황당한 소리냐 하는 표정이다. 내 파트너인 그 양반은 나와 동수인 상대팀 사람에게 4점 핸디를 받고 친다. 그러니 실력의 균형도 맞을뿐더러 하수가 할 소리는 아니다. 물론 그 양반은 내가 상대팀 에이스와 동수인 걸 모르고 하는 얘기다. 자기가 볼 땐 내가 자기보다 하수인 줄 알고 그러는 거다.

 

상대팀에서 말도 안 된다며 손을 내저어 서로 웃으며 그렇게 그냥 넘어갔는데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생각 같아선 당장 둘이 개인전을 한 판 붙어 서열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꾹 눌러 참았다. 이럴 때 흥분한 마음으로 붙었다가 만에 하나 지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된다. 탁구라는 게 단기승부에서는 어떤 이변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미 심리적으로 무너진 상태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럴 땐 한 발 물러서는 것이 상책이다. 아무 내색 안 하고 미소로 그 자리를 넘겼다.

 

어제 다시 한 번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또 둘이 파트너가 되어 전에 그 팀을 상대하게 되었다. 평소 나는 승부욕도 약하지만 몸 상태를 생각해 설렁설렁 친 게 사실이다. 대개 복식을 치면 나와 동수인 상대팀 에이스와 나는 주로 공격을 안 하고 공을 어렵게 안 넘겨준다. 봐주는 건 아니지만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하수들과 섞여 치면서 재미있게 치기 위한 둘만의 암묵적인 합의다.

 

그런데 이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작심하고 제대로 한 번 쳐서 실력을 보여주리라 결심했다.

내가 파트너보다 확실한 상수인 걸 알려주고 싶었다. !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상황은 최악이 되고 말았다. 작심하고 평소 복식에서 안 쓰던 강하고 어려운 서비스를 넣었더니 상대팀 하수가 당황해 얼떨결에 갖다 댄 공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튀어 엣지가 났다. 힘이 들어갔는지 내가 마음먹고 때린 스매싱은 네트를 맞고 아웃! 뭔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상대팀의 행운도 이어졌다.

 

실력 증명은커녕 역시 하수군 하는 경멸의 눈초리가 꽂혀오자 당황하고 말았다. 여전히 내 파트너는 내 시야와 진로를 가린다. 내가 그걸 감안해 한 발 더 움직여 미리 돌아들며 겨우 받아 넘기는데 그 때마다 생기는 찬스에서 이 양반이 공격을 안 하고 오히려 찬스를 준다. 그 바람에 나는 이 쪽 저 쪽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받느라 정신없었다. 공격을 안 하니 내가 승부를 할 수밖에 없는데 자세가 안 잡힌 상태에서 무리한 공격을 하다 보니 실수를 안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통계를 내본다면 분명 내 파트너의 실수가 나보다 최소 64 이상으로 많았겠지만 기분 상 내가 실수한 게 훨씬 많게 느껴진다. 말렸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완전 똘똘 말려버리고 말았다. 또 졌다. 지난번보다 더 크게, 약간은 허무하게 패하고 말았다. 이거 이상하게 내가 스스로 하수임을 확인한 꼴이 되어 버렸다. 약이 바짝 올랐다.

 

어젯밤에 잠자리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가 하수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실력으로 압도하지 못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흥분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것도 내가 하수라는 증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정도! 오늘은 내가 진짜 하수인 걸 인정하고 겸손하게 마음을 비우고 숙이리라 다짐에 다짐을 하고 탁구장에 갔다. 마침 그 분은 오늘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유별나게 평소보다 탁구가 잘 됐다. 내일은 그 분이 나오실까? 내일 또 꼬이면 어떡하지? 자신을 단련할 좋은 기회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술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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