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구장 기인열전-탁신 자작단편소설


“어머! 이걸 어째?”

40대 후반 L여사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에 탁구장 관장은 로커(locker) 쪽을 돌아보았다. L여사가 개인 로커를 열어놓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오전반 첫 손님이다. 이제 막 탁구장에 들어서던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인사할 생각도 못하고 L여사를 바라봤다. 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 그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L여사님, 왜? 왜 그러세요?”

“관장님, 이거 보세요. 제 라카가 텅 비었어요!”

“어! 그러네. 원래 뭘 넣어놓으셨어요?”

“라켓하고 운동화요. 공도 몇 개 있었는데 누가 싹 훔쳐갔나 봐! 어쩜 좋아요?”

30분도 안 돼 탁구장 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똑같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로커가 비어 있었다. 없어진 물건도 거의 탁구라켓과 탁구화 등 탁구용품들이다. 도둑이 든 게 분명했다. 오랜 된 탁구클럽이라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탁구장 문은 번호로 여는 전자키다. 관장이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어 회원들이 문을 열기도 한다. 어젯밤 관장은 분명 탁구장을 정리하고 문을 잠그고 퇴근했었다. 누군가 번호를 아는 자의 소행이다.

탁구 라켓이나 운동화는 별 거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꽤 고가의 용품들이다. 라켓이나 운동화 모두 쓸 만한 것들은 20만 원이 훌쩍 넘는다. 중고로 팔아도 꽤 돈이 된다. 그렇다고 남들이 쓰던 용품을 훔쳐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다들 황당해한다. 탁구도 칠 수 없게 됐다. 관장은 일단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에서 조사를 나왔지만 범인이 남긴 흔적은 찾지 못했다. 로커도 번호로 여는 방식인데 강제로 뜯은 흔적은 없었다. 로커 역시 번호를 알고 연 것이다. 아마 로커를 열 때 몰래 보고 번호를 외운 게 분명했다. 탁구장을 잘 아는 회원 중 누군가가 범인이다.

범인은 삼일도 지나지 않아 저절로 밝혀졌다. 한 사람이 삼 일 전부터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별명은 “탁신”이었다. “탁구의 신”의 줄임말이다. 놀랍게도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고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심지어 전화번호조차 알지 못했다. 처음 회원으로 가입할 때 썼던 이름과 전화번호는 모두 엉터리였다. 다들 그저 “김사장”으로만 알고 있었고 별명인 “탁신”이 더 익숙했다.

탁신은 삼 개월 전부터 클럽에 나오기 시작했다. 40대 중후반 쯤 됐을까? 훤칠한 키에 탄탄하고 균형 잡힌 몸매는 운동으로 다져진 게 분명했다. 얼굴도 잘 생겼지만 인상이 참 좋았다. 늘 웃는 얼굴이고 인사성 밝고 매너도 더할 나위 없었다. 오자마자 여성회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외모나 성격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탁구를 잘 쳤기 때문이다.

중국 관련 사업을 하는데 어려서부터 중국에 드나들며 탁구를 배웠다고 했다. 관장을 빼곤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다. 회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관장과 벌인 게임에서 거의 대등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아쉽게 패하기는 했지만 관장을 그만큼 몰아 부친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관장도 탁신의 실력을 인정했다. 그의 별명은 자연스럽게 탁신이 됐다.

탁신은 관장 보는 데서 건방지게 하수들을 가르치거나 하지 않았다. 하수라고 무시하는 법도 없었다. 아무나 원하면 아무리 초보라도 공을 받아주고 친절하게 아주 잘못된 자세나 슬쩍 지적해줄 정도였다. 게임도 피하지 않았는데 당할 사람이 없었다. 탁신한테는 져도 기분이 좋았다. 정통파인데다 게임할 때도 매너가 정말 좋았다. 좀 친다하는 회원들이 탁신과 치고 싶어 줄을 섰었다. 특히 여성회원들이 열광했는데 워낙 잘 생기고 매너 좋고 탁구도 잘 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랬던 탁신이 모든 정황상 범인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그 때까지도 설마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다. 경찰은 일단 인상착의로 범인을 수배해보겠지만 대개 이런 경우 찾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오래 준비해 털어갔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 동안 깜빡 속았다는 사실에 다함께 놀라고 의아해했다. 그 탁구용품을 다 합쳐 중고시장에 판다고 해봐야 얼마나 될까? 아무리 많이 쳐줘도 2~3백만 원이 안 될 것이다. 그걸 위해서 삼 개월을 공을 들여 사람들을 속였단 말인가? 더구나 그렇게 훌륭한 탁구실력과 나무랄 데 없는 외모와 언행까지 갖춘 사람이!

“아무튼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경찰이 조사를 마치고 탁구장을 나서려던 순간,

“저....잠깐만요! 저....”

처음 빈 로커를 발견했던 L여사였다.

“예, 말씀하세요.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한동안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던 L여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예,....사실은...그 사람이 저한테 돈을 빌려갔거든요.”

“예!! 아니 그걸 왜 이제 말씀하세요? 얼마나요?”

“아니...큰돈도 아니고.. 저도 아까는 뭐가 뭔지 몰라서....”

“자세하게 말씀해 보세요?”

일주일 전에 탁구장 관비를 내야 하는데 지갑을 두고 왔다며 관비를 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얼마 안 되고(15만 원) 바로 갚겠다고 해서 빌려주었는데 며칠 째 안 갚았지만 설마하고 닦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깜빡했겠지 싶어 이번 주에도 안 갚으면 얘길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아이고! 나도 당했네! 나도!”

L여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여성회원들 거의 전부가 같은 일을 당했다고 떠들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각자 빌려 준 날짜는 달랐지만 모두 지난 일주일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그제야 다들 혹시나 이상하게 볼까봐 미처 얘기를 못했다고 하며 분통을 터뜨린다. 피해자만 얼추 20여명이 넘는다. 다 탁신과 한 게임 하고 싶어 안달하던 탁구깨나 치는 여성회원들이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도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관장은 탁구장 여기저기에 CCTV를 달고 “로커에는 탁구 라켓 등 귀중품을 두지 마세요.”라고 크게 써 붙였다. 탁신은 누구였을까? 그 정도 탁구 실력이면 어디 가서 레슨을 해도 그 정도 돈은 벌겠건만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닐까? 혹시 훔친 물건들은 진짜 중국에 가져다 파는 걸까? 사건 이후 탁구장 회원들은 왠지 어색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특히 새로 누가 오면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래도 가끔 탁신의 기가 막힌 탁구실력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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